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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월 이야기>, 그리고 벚꽃향

by 엠닷 2025. 4. 10.

영화 &amp;lt;4월 이야기&amp;gt;벚꽃과 자전거

 

 

벚꽃이 흩날리는 장면은 유독 감정을 자극합니다. 특히 영화 속에서 벚꽃은 단순한 계절적 배경을 넘어, 인물의 감정이나 내면 풍경과 맞물리는 시적 장치로 자주 활용됩니다. 그중에서도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1998)는 벚꽃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섬세하게 감정을 매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우즈키(마츠 타카코)가 도쿄로 상경하며 겪는 내면의 떨림과 설렘,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봄이라는 계절과 벚꽃을 통해 표현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곧 한국에서의 재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글에서는 영화 《4월 이야기》에 나타나는 벚꽃 이미지와 더불어, 우리가 인식하는 ‘벚꽃 향기’라는 개념의 탄생과 진화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화 속 벚꽃: 시각을 넘어 후각으로 확장되는 감각

《4월 이야기》의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벚꽃길을 천천히 통과하는 트럭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시선을 압도하는 벚꽃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이야기의 정서적 톤을 설정합니다. 영화 속에서 벚꽃은 우즈키의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 처음 겪는 낯선 도시에서의 고요한 긴장감과 어우러져, 마치 향처럼 감정에 스며듭니다. 관객은 이 장면을 보며 '이 장면은 어떤 향이었을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이처럼 영화 속 이미지는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향기를 상상하게 하는 후각적 연상으로 확장됩니다. 향기와 감정은 뇌의 같은 부위(편도체, 해마 등)를 자극하기 때문에, 감정이 묻어난 장면은 향기의 기억을 동반하기 쉽습니다. 《4월 이야기》의 잔잔한 전개와 여백이 많은 미장센은 향수의 노트처럼, 각 장면에 감정을 덧입히고 잔향을 남깁니다. 이는 단순한 감성의 소비가 아니라, 감각 간의 연동을 통한 복합적인 인식의 결과입니다.
비슷한 감각적 연상이 돋보이는 또 다른 예로는 《빨강머리 앤》이 있습니다. 특히 1980년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빨강머리 앤(赤毛のアン)》에서는 벚꽃이 만개한 프린스에드워드섬의 봄이 인상적으로 그려지며, 주인공 앤 셜리가 벚꽃나무에 "스노우 퀸"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감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은 벚꽃이 단순한 식물로서가 아니라, 상상력과 감정의 매개체로 기능함을 보여줍니다. 자연을 향으로 느끼는 앤의 시선은 《4월 이야기》의 우즈키가 느끼는 벚꽃의 조용한 설렘과도 닮아 있습니다.


벚꽃은 왜 향이 없는데, 우리는 그 향을 기억할까?

벚꽃의 향기에 대해 말할 때,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벚꽃 품종이 실제로는 뚜렷한 향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는 특히 무향에 가까운 품종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벚꽃 향을 '기억'하고 있으며, 봄이면 수많은 브랜드들이 '사쿠라 향'을 테마로 한 향수, 화장품, 식음료를 출시합니다. 이 간극은 어떻게 발생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향기의 ‘재현’과 ‘상상’에 있습니다. 조향사들은 실재하는 벚꽃 향이 아닌, 벚꽃이 주는 이미지 — 연한 분홍빛, 부드러움, 청초함, 짧은 만개 — 을 해석하여 향기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는 벚꽃 향은 특정한 식물성 원료에 기반한다기보다, 이미지 기반의 향 조합(accord)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노트가 활용됩니다:

  • 탑 노트: 체리, 라즈베리 등 붉은 베리류의 프루티 노트
  • 미들 노트: 피오니, 프리지아, 로즈 같은 플로럴 노트
  • 베이스 노트: 머스크, 화이트 우드, 앰버 등 부드럽고 파우더리한 향

이 조합은 벚꽃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와 계절적 분위기를 가장 잘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설계됩니다. 따라서 ‘벚꽃 향’은 사실상 봄이라는 시간, 특정한 감정, 그리고 문화적 연상을 포함한 종합적인 감각적 구성체입니다.


향수와 영화의 감각 구조: 공통의 미학

흥미롭게도 향수와 영화는 모두 시간 속에서 경험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향수는 탑 노트부터 미들, 베이스로 전개되며, 영화는 장면과 시퀀스의 흐름으로 감정을 조율합니다. 《4월 이야기》의 구성은 마치 하나의 향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조심스럽고 맑은 탑 노트, 중반부는 우즈키의 내면 변화가 반영된 따뜻한 미들 노트, 마지막은 고백의 순간과 함께 남겨지는 여운 — 잔향과도 같은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감정의 구조는 조향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향수가 단순히 좋은 냄새를 넘어, 특정한 분위기와 감정의 곡선을 설계하는 작업이라면, 영화 역시 시청각 요소를 통해 감정의 리듬을 설계하는 예술입니다. 《4월 이야기》는 향수의 구조를 빌어 설명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감정의 선율이 뚜렷한 작품입니다.

 


문화적 ‘사쿠라’의 확산과 향기의 정체성

일본에서 ‘사쿠라’는 단지 식물 이름이 아니라, 문화적 아이콘이자 정체성의 일부로 작동합니다. 매년 벚꽃 시즌마다 한정 출시되는 다양한 제품들은 단지 시즌 마케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계절 감각과 감정 회로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향수 브랜드 역시 이 시기에 맞춰 '사쿠라 에디션'을 출시하며, 벚꽃의 이미지와 향기를 상품화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록시땅의 ‘체리 블라썸(Cherry Blossom)’, 페르퓸드사봉의 ‘사쿠라’, 시세이도의 ‘에버 블룸 사쿠라’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실제 벚꽃이 아닌 벚꽃의 감성을 향으로 구현한 사례입니다. 이처럼 ‘벚꽃 향기’는 실체보다 이미지와 기억에 의해 구성되는 감각이며, 그것이 오히려 더욱 보편적인 정서로 작동하게 됩니다.

 

록시땅의 &lsquo;체리 블라썸(Cherry Blossom)&rsquo;페르퓸드사봉의 &lsquo;사쿠라&rsquo;시세이도의 &lsquo;에버 블룸 사쿠라&r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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